강원도 인제에서 44번 국도를 따라 한계령으로 올라가다 보면 내설악의 명소 중 하나인 옥녀탕이 나온다. 옥녀탕 휴게소에서 좌측의 계곡을 따라 30분 정도 오르다 보면 계곡 좌우로 돌로 쌓은 성벽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바로 한계산성이다. 이 산성은 산악구조대의 안내가 없이는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험준한 산속에 축조돼 있다.

한계산성은 한계령 북쪽, 안산(해발 1430m)을 중심으로 축조된 성으로 둘레가 5㎞ 이상 되는 대규모 산성이다. 그러나 험준한 산세를 최대한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성벽을 축조한 구간은 328m에 불과하다. 산성은 계곡의 가장 낮은 곳에 남문(南門)을 설치하고 동쪽의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서 접근이 가능한 부분에만 돌을 쌓았다.

남문은 너비 1.6m, 높이 2.2m로 위아래에 긴 장대석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성안으로 출입할 때는 거의 이 남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문에서부터 동쪽으로 능선을 따라 큰 바위에 이르기까지 58m에 이르는 구간에 성벽이 쌓여 있는데 높이는 6m 정도에 이른다. 바위 위로도 성벽은 10m 정도의 길이로 간헐적으로 축조돼 있다. 이곳의 성벽 높이는 1.5m에 불과하지만 가파른 경사에 쌓였기 때문에 성벽에 오르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남문에서 1㎞쯤 올라가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이 있었다 해서 천제단(天祭壇)으로 불리는 다소 평평한 언덕이 나타난다. 여기에는 성벽을 쌓을 때 쓰던 돌을 이용, 탑 모양으로 세 개의 제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각기 비석과 제단을 갖추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탑의 규모는 세 개가 약간씩 다르지만 높이가 1.5m 정도이고 비석은 큰 것이 1m 정도, 작은 것은 70㎝ 정도다.

이 돌들 중 하나에는 언제 새긴 것인지 확인되지 않은 명문(銘文)이 이끼가 낀 채 남아 있다. 무신(戊申)·신미(辛未)·경오(庚午) 등의 간지(干支)와 김성진(金成鎭)·김세진(金世震) 등의 이름이 있어 앞으로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천제단에서 성벽 바깥으로 100m쯤 가면 비교적 너른 집터가 있는데 대궐터로 불린다. 여기에서는 옹기편이 많이 발견됐다.

산성은 천제단으로부터 능선을 따라 안산 정상을 돌아 서쪽 능선을 따라 남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1986년 강원대가 한계산성의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는 산성의 규모를 1.8㎞로 파악했는데 이는 안산 정상에서 서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성벽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군박물관 국방유적조사단은 2002년 이 산성을 조사하면서 산악구조대의 협조를 받아 험준한 서쪽 능선을 답사해 석벽의 존재를 확인, 산성의 최대 추정 규모가 대략 5㎞에 이를 수 있음을 밝혀냈다.

산성의 내부에는 절터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있다. 여기에서는 ‘지정(至正) 18년’이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여러 장 발견됐다. ‘지정’은 공민왕 7년(1358)에 해당하는 원(元)나라 연호다. 이는 여기에 고려 말에 세워진 절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한계산성이 언제 처음 축조됐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조사 당시 수습된 수십 점의 기와 조각과 그릇 조각들은 대체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는 고려시대에 이 산성 안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일 뿐 산성의 축조 시기를 말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종 46년(1256)에 조휘(趙暉)가 몽고병을 이끌고 한계성을 공격했는데 방호별감 안흥민(安興民)이 야별초를 이끌고 나와 싸워 모두 섬멸시켰다”고 기록돼 있는 점으로 볼 때 한계산성은 몽고의 침입시 인근의 군민들이 이 산성에 들어가 몽고군을 맞아 싸웠으므로 산성의 축조는 이보다 더 빠른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내설악의 험준한 산속에 산성을 쌓아야 할 만큼 우리 조상들은 외적의 잦은 침입에 시달려 왔고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우리나라 전역에 남아 있는 수많은 산성은 바로 우리 조상들이 외적의 침입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애쓴 호국의 산증거이자 지혜였던 것이다. 한계산성은 보통 사람들이 맨몸으로도 오르기 어려운 험준한 곳에 돌을 지고 날라 성벽을 쌓고 성 안에 들어가 이민족과 싸운 조상들의 호국정신을 생각케 하는 산성이다.


국방유적의 소중함과 선조들의 호국정신을 일깨우고자 마련한 이 기획물의 연재를 13회를 끝으로 마치게 됐습니다. 그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 이현수 육군사관학교 사학과 교수·육군박물관장 〉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4. 4. 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