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6월 말, 연천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부대에서 괴질 환자들이 발생해 미군 이동외과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환자들은 공통적으로 두통과 고열·오한과 함께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얼굴과 가슴에는 출혈반이 생겼으며 혈압이 떨어지고 1주일 뒤에는 소변이 잘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단백뇨·혈뇨가 동반하기도 했다.

같은 해 7월에도 같은 부대에서 같은 증상의 괴질 환자 68명이 동시에 발생했고, 이듬해 여름까지 환자는 1500여 명으로 늘어나 그중 122명이 목숨을 잃었다. 급기야 미군뿐만 아니라 영국·캐나다·호주군 등 다른 유엔 참전군 중에서도 환자가 발생해 54년 말까지 환자가 2423명에 이르렀다.

유엔군 내부에서는 소련군이 생물 무기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일부 제기되는가 하면 괴질 규명을 위해 노벨상 수상자 2명을 포함한 230여 명의 미국의 최고 연구진을 서울로 급파하는 비상 조치를 취했다.

연구진은 조사를 통해 이 병이 1939∼41년 일본군이 만주에서 겪은 유행성출혈열과 흡사하다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67년까지 무려 15년간 막대한 연구비와 인력을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원인 병원체를 찾지 못한 채 미지의 숙제로 남겨 두었다.

세계의 석학들도 밝혀내지 못한 이 괴질의 비밀이 벗겨진 것은 76년 한국 의사 이호왕 박사에 의해서다. 이박사는 세계의 학자들이 포기한 이 연구에 뒤늦게 뛰어들어 처음 수년간 실패를 거듭했지만 75년 겨울 형광항체법을 이용, 쥐의 허파에서 특수한 항원을 발견하게 됐고 마침내 76년 유행성출혈열의 원인 바이러스를 발표하게 된다.

이박사는 한탄강에서 잡은 등줄쥐에서 원인 바이러스를 찾아낸 의미로 강의 이름을 따 이 바이러스를 한타바이러스(Hantavirus)라고 명명했다. 세계는 이 놀라운 발표에 떠들썩했고 이박사는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로 점쳐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런 화려한 업적 이면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초가 많았다. 유행성출혈열이 야외에서 활동하는 군인·농부에게서 많다는 점에 착안, 등줄쥐 채집에 나섰는데 밤낮 가리지 않고 전방에서 3000여 마리의 등줄쥐를 잡다 보니 간첩으로 오인받아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했다.

연구팀이 한타바이러스 연구 결과를 발표하자 이번에는 북측에서 휴전선 일대 비무장지대의 확성기를 통해 “남조선의 이호왕이 미군의 사주를 받아 세균전에 대비한 바이러스 무기를 만들어 냈다”고 비방 선전을 쏟아 부었다.

이박사의 열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80년 서울바이러스 세계 최초 발견, 88년 한타바이러스 예방 백신 세계 최초 개발로 이어졌으며 올 초까지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을 맡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했다.

지금도 전세계적으로 해마다 20만 명 이상이 각종 바이러스에 의한 신증후성출혈열(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되고 있다. 20세기의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뻔한 이 질병의 비밀이 풀리기까지에는 자랑스러운 한국 의료인의 집념이 있었다.

< 출처 : 국방일보=밀리터리 리뷰, 2004. 10. 29 >